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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E.W.S.(동서남북) - 동서남북 (1981)
    Art Rock 세상 2017. 4. 29. 03:06

    '07.12.09 

     

     

     

    동서남북은 유일한 앨범 < 아주 오랜 기억과의 조우 (원 발매 명은 N.E.W.S.) >를 통해 우리나라 프로그레시브 록의 가능성을 열었던 그룹이다. 특히 이들의 대표곡 '나비(Extended version)'는 해외에서도 흔치않은 3인 편성의 건반 시스템이 뿜어내는 풍성한 건반연주와 긴박감 넘치는 전개로 심야 FM 프로그램들과 각종 아트록 가이드북을 통해 한국 프로그레시브의 자존심을 세운 곡으로 소개됐고, 늘 외국산(?)에만 의존해야 했던 국내 아트 록 팬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1980년 경성고등학교 동창인 박호준(고려대, 기타, 리드 보컬), 이태열(국민대, 베이스, 보컬)을 축으로 박호준과 고대 동기인 이동훈(오르간), 김득권(서울대, 드럼), 이관형(청주대, 키보드)을 합류 시켜 결성된 동서남북은 이태열과 음악적으로 교류하던 명지대 출신의 김광민(키보드), 김준응(리드 보컬)이 가세하여 7인조 라인업이 갖춰졌다.

     

    멤버들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와 킹 크림슨(King Crimson), 넥타(Nektar)등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탈리아의 아트록 그룹 일 볼로(Il Volo)의 영향은 없었다고 한다)를 롤 모델로 삼았지만 퓨젼 재즈, 블루스, 하드 록 등 다양한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했던 그룹은 브레드(Bread, 국내에 'If'라는 곡으로 유명한 소프트 록 밴드)였을 정도로 음악 취향이 다양했다. 그룹의 목표는 대학가요제 중심의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하고 프로 의식 있는 팀을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초기 자금사정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이들은 포크계의 거물이자 기획자이던 양병집이 후원하면서 날개를 얻는다. 그가 운영하던 '모노(Mono)'라는 라이브 카페에서 고정 공연을 펼치며 꿈을 키워나가 던 이들은, 첫 앨범 <N.E.W.S(동서남북의 영어약자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이라는 해석도 가능)> 1980년에 녹음하고 기술적인 손질을 거쳐 이듬해 2월에 서라벌레코드를 통해 공개한다.

     

    양병집이 자비를 들여 스튜디오에서 3시간 반 만에 마무리 되었으며, 2채널로 녹음한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내용은 견실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평가받는 '나비(Extended version)'를 비롯하여 하드 록, 블루스 록, 퓨젼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곡이 어우러졌다.

     

    비록 앨범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지만 동서남북은 KBS 프로그램인 '100분 쇼'에 고정으로 출연해 인기를 끌었고, 자금조달과 홍보를 위해 대규모의 관제 문화행사였던 '국풍 81'에도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국풍 81'에서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음에도 프로 밴드로 참여했기 때문에 아마추어에게 상을 주는 대회 규정상 1등상을 이용에게 양보했다는 비화도 전해진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와 음악지향이 이동(프로그레시브 록에서 퓨젼 재즈로)되면서 그룹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밴드들의 공연을 소개했던 TV프로그램인 '젊음의 행진', '11'등 출연 시엔 빠져나간 멤버들을 대체하기 위해 수소문해야만 했을 정도였다. 결국 1982년 그룹은 해산됐다. 이후 박호준김광민은 미국 유학을 떠났고, 이태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을 작곡하여 히트 곡 작곡가 대열에 진입하는 등 제각각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기적은 해체된 뒤 일어났다. 마니아들의 입소문을 통해 이들의 유일한 앨범은 강한 컬트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결국 아트 록 마니아들의 성화로 1988년 예음사를 통해 앨범 아트워크가 바뀌고 '나비'의 편집 버전이 추가되어 < 아주 오랜 기억과의 조우 >라는 타이틀로 재발매됐다.

     

    기다린 팬들과 뒤늦게 이들의 진가를 알아차린 음악 마니아들의 집중구매로 특별한 홍보 없이도 3판 이상 찍어낼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하나가 되어요'는 다운타운가 차트의 10위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고, '나비(Extended Version)'는 음악 마니아들의 인기 FM 프로그램인 '전영혁의 음악세계' 1995년 연말애청곡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1998년에는 국내에 아트 록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던 성시완의 한국 록 명반 재 발굴의 취지로 CD로 출시, 새로운 매체를 통해 동서남북 곳곳에서 다시 한번 이들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해산 이후 팬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길을 찾아 나선 이들은 끝내 재결성되지 않았다. 버클리 음대와 뉴잉글랜드 음악원(New England Conservatory of Music)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은 박호준은 이후 드라마 <아일랜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음악을 담당했으며 서울예대를 거쳐 2001년부터는 동덕여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같은 동덕여대 실용음악과 교수인 김광민은 미국에서 박사수료를 거쳐 재즈 피아니스트 및 MBC <수요예술무대> 진행으로 활약하는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우리나라 음악 발전을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비록 열악한 국내환경으로 짧게 활동한 탓에 많은 작품을 남기진 못했지만, 재기 넘치는 실험정신이 담긴 유일한 앨범과 함께 동서남북은 한국 록의 자존심을 지켜 준 그룹으로 국내 음악 팬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될 것이다.

     

       윤석진 (fand@hitel.net)

    동서남북 사반세기-박호준 교수 인터뷰
       


    지금으로부터 꼭 25년 전인 1980년, < N.E.W.S. >라는 타이틀의 생소한 록 밴드 동서남북 앨범이 발표되었다. 의기와 신선함으로 가득했던 이 록 앨범은 일반의 관심을 전혀 얻지 못한 채 나오자마자 매몰되어버렸고, 그룹은 변변한 활동도 해보지 못하고 곧바로 한국 록 밴드의 상습적 굴레인 해산의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동서남북은 자취 없이 사라져갔지만, 그들의 유일한 그 앨범은 두고두고 음악마니아들 사이에서 회자되면서 적어도 역사에서는 존재를 각인했다. 뒤늦게 앨범을 접한 사람들은 우리에게도 이런 음악을 한 밴드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으며, 당대의 유행에 타협하지 않은 순수한 예술성에 찬사를 보냈다.

    앨범은 그러면서 '국내 최초의 아트 록 앨범'이라는 영예의 수식을 달게 되었다. 동서남북의 멤버였던 현 동덕여대 실용음악과 박호준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현실의 갈채가 따르지도 않은, 그리고 음악적으로도 완성도를 득하지 못한 '비운의 레코드'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역사의 은근한 갈채가 지속되는 '영광의 레코드'로 남게 된 셈이다.

    박호준교수는 이태열, 김득권, 이관형, 김광민, 김준응 등과 함께 결성한 그룹의 명실상부한 지휘자였다. 그는 앨범의 대부분 곡을 작사 작곡했고 편곡 구상의 주체였으며, 마니아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한 곡들인 '나비' '빗줄기' '바람' 그리고 대중성이 넘실댄 '하나가 되어요'는 직접 노래하기도 했다.

    만나자마자 '올해가 동서남북 25주년'이라고 하자 박교수는 “벌써 그렇게 됐나? 아쉬움이 많았던 앨범인데...” 하고 겸연쩍어하면서도 감회에 서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앨범의 수록곡 하나하나 만든 과정을 비롯해 앨범에 대한 자평, 멤버들의 현재, 자신의 음악관 등을 소상하게 전해주었다.



    동서남북 앨범이 나온 지 어느덧 올해로 사반세기가 흘렀습니다. 소회를 듣고 싶네요.
    부끄러운 앨범인데... 아쉬움이 많죠. 당시 멤버 전원이 아마추어였고,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연습할 곳도 마땅치 않아 제 집에서 했어요. 포크의 선구자이셨던 양병집선배가 제작자였는데, 대중적인 압박이 컸던 시점에서 그런 판을 내준 것도 고마웠죠. 그러나 멤버들이 바라던 완성도는 획득하지 못했어요. 2트랙 녹음에다 후다닥 한 프로에 7곡을 전부했다는 게 가장 아쉽습니다. 2곡만 서울 스튜디오에서 더빙했죠. 2트랙은 노래와 기타만 부분적으로 더빙이 가능하거든요. (스튜디오 대여 시 한 프로는 3시간 30분이다. 90년대에 웬만한 앨범은 대개가 70-80프로를 소요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졸속'인 셈이다)

    사람들이 동서남북 앨범을 접하게 된 것이 81년 초반이니까 녹음은 정확히 25년 전 이맘때쯤에 했을 것 같은데, 맞나요? 그룹은 언제 결성된 건가요?
    제가 78학번(고려대)이니까 대학 1학년 말인 78년 겨울 때쯤 결성했고, 2학년 때부터 활동을 했습니다. 10.26사태(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때 휴교령이 내려져 학교에 못 가서 연습을 할 수 있었죠. 녹음은 말씀하신대로 80년 초여름 때쯤 들어갔을 거예요. 앨범이 나오고 '국풍81'행사에 게스트로 출연했던 게 기억나네요.


    정규 멤버가 누구였는지 조금은 헷갈리는데, 결성 때의 멤버와 실제 녹음에 참여한 멤버가 다르죠?
    제가 기타와 보컬, 이태열이 베이스, 김득권이 드럼을 맡았고 보컬은 김준응이었습니다. 김준응은 '모래 위의 핀 꽃'과 '그대'를 불렀고 코러스에 참여했죠. 김광민, 이관형, 이동훈이 건반주자였는데 여기가 문제였죠. 들락날락거렸으니까요. 앨범의 전반적인 건반연주는 김광민이 해주었습니다.

    결성의 주체는 아무래도 박호준교수와 이태열씨로 보이는데...
    이태열과 저는 경성고 동창이었어요. 태열이가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던 친구 김준응, 이관형을 소개했어요. 김준응은 고1때 만났죠. 나중 김준응(명지대)이 같은 대학을 다닌 김광민을 소개한 거죠. 그룹은 다들 그렇지만 '소개의 사슬'이 작용합니다. 이동훈은 저와 같은 고대생이었고 김득권은 서울대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학교가 다 달랐죠. (이태열은 국민대, 이관형은 청주대를 다녔다고 했다)

    지금은 다들 무엇을 하고 계신지.
    이태열씨는 과거 광고기획사 오디오 PD였는데 이광조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을 작곡한 분이죠. 지금도 광고 쪽에서 일하는 것으로 압니다. 김광민씨야 재즈 피아니스트로 유명하니까 아실 거고, 제 옆방(동덕여대 실용음악과교수)이에요. 이동훈은 고대교수, 김득권은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다른 멤버는 연락을 자주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동서남북 녹음할 당시로 돌아가서, 그 무렵 어떤 음악이 인기를 얻고 있었는지 기억하시는지.
    조용필씨의 '단발머리'가 전파를 휩쓸고 있었던 것은 기억나는데, 글쎄 가물가물하네요. 송골매도 인기였고 산울림이 아주 유명할 때였죠. 블랙 테트라도 있었고...

    그룹을 결성할 때 음악적 지향은 무엇이었나요? 당시의 음악풍조에 대한 반작용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당시 음악계는 대학가요제가 중심이었어요. 그 분들이 TV를 점령했죠. 대학가의 밴드가 인기를 누렸지만 전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하는 밴드에 시선이 가있었죠. 캠퍼스밴드보단 그들이 더 자질이 뛰어났거든요. 예를 들어 '한동안 뜸했었지'의 '사랑과 평화'도 제 영웅 중의 하나였는데, 그들 연주에는 잔 때가 있잖아요. 우린 정말 제대로 된 음악을 하고 싶었죠. '프로 뮤지션십'을 추구했던 거죠.

    그럼 동서남북 음악은 어땠다고 봅니까? 앨범을 만들 때 멤버들이 좋아했던 음악, 이를테면 롤 모델이 있었을 텐데...
    우리야 좋아하던 음악 흉내 내기 수준이었죠. 전 중고교 때부터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킹 크림슨(King Crimson), 넥타(Nektar)와 같은 프로그레시브 록에 열광했죠. (핑크 플로이드 앨범 중에서는 혹시 < Wish You Were Here >를 좋아하지 않았냐고 묻자 자신의 경우는 'Echoes'가 수록된 71년 앨범 < Meddle >이라고 했다) 그런 음악을 듣고 뮤지션을 꿈꾸었구요. 기타리스트다 보니 특히 제프 벡(Jeff Beck)을 숭배했습니다. 멤버들이 좋아하는 음악은 다 달랐죠.
    하지만 전원의 성향이 일치한 그룹은 브레드(Bread)였어요. 당연히 동서남북에도 대중적인 면이 투영되었죠. 동서남북의 음악적 지향은 제가 주도했다고 보는데, 아무래도 밴드에선 (해외음악 동향 파악에) 앞서 있는 사람이 리더를 맡게 되잖아요. 나중 김광민과 만났을 때, 취향이 많이 일치했죠.



    조금 전에 대중적인 면을 언급하셨는데, 첫 곡인 '하나가 되어요'가 그것에 대한 반영 아닌가요?
    맞습니다. 녹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타이틀곡, 즉 매체에 홍보할 곡이 없다는 제작자의 판단에 따라 결정된 곡이죠. 좀 부끄럽죠. 대중적이라는 이름의 곡들이 보면 음악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맘에 안 드는 경우가 많죠.

    그런 점에서 나름대로 평가할 수 있는 동서남북 곡이 있다면?
    '나비'는 저의 당시 음악적 비전을 어느 정도 구현한 곡이죠. 이 곡과 '바람'이 그나마 애착이 갑니다.

    록 마니아들은 앨범을 '아트 록'이라고 규정하잖아요. 거기에 동의하는지. 저는 수록된 곡들이 저마다 달라 일체감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일례로 '모래 위의 핀 꽃'은 메탈이고, 반면 연주곡 '밤비'는 서정적이거든요.
    인정합니다. 아트 록 앨범이라고 할 수는 없죠. 여러 스타일이 얽힌, 조금은 들쑥날쑥 이었으니까요. '모래 위의 핀 꽃'은 김준응의 목소리를 살려주기 위한 곡이었습니다. 가성적 고음을 구사하는 그의 보컬은 특별한 메탈 풍, 유라이어 힙(Uriah Heep) 성향이었거든요. 그것을 살려 전형적인 록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였죠. '밤비'는 이태열 곡이죠. 이걸 제외하고는 전부 제 곡이라서 균형을 위해 그의 곡이 필요했습니다. 태열이는 대중적 취향을 갖고 있었죠.

    '바람'과 '그대'는 프로그레시브 하다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그렇다고 딱히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곡들로 생각됩니다. 조금은 애매하게 들린다고 할까요.
    (웃으며) '그대'는 녹음 하루를 앞두고 간단히 술 한 잔 하자고 했다가 새벽까지 마시게 됐고, 그래서 다음날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녹음에 들어가다 보니 앞서 해둔 편곡의 구상이 바뀌어버린 곡입니다. 저하고 광민이의 합작이었는데, 당시 화성적인 개념에 눈뜰 때의 곡이죠. '빗줄기'도 화성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곡이었습니다. 그 무렵 음악은 록에서 퓨전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던 때였거든요. 칙 코리아(Chick Corea), 허비 행콕(Herbie Hancock) 등에 대한 관심이 솟아올랐죠. 그런 흐름을 담아내려고 했던 곡들이었던 셈이죠.

    편곡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편곡을 연습하면서 말로 하던 시절이었죠. 제가 중심에 서서 합주를 거쳐 윤곽을 잡았습니다. 참, 그런데 사운드 입장에서 감독 역할을 해준 장용호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가 우리가 연주한 스코어링(scoring)을 받아 적은 것을 비롯해서 팀의 정서적, 재정적 그리고 악기의 측면에서 디렉터였습니다. 그의 프로듀싱 힘이 컸죠.

    '하나가 되어요'도 그렇지만 잘만 홍보되었으면 충분히 소화될 수 있는 멜로디의 곡들이 없지 않은데, 왜 그리 결과가 지지부진했던 거죠?
    앨범을 내자마자 팀이 와해되어버렸어요. 활동을 해야 곡이 알려지고 할 텐데, 멤버가 없는 겁니다. 그럼 끝이죠.

    83년에 왜 미국행을 택한 건가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당시 음악은 록에서 퓨전으로 옮겨가고 있었죠. 82년쯤에는 한상원, 김광민, 정원영 그리고 저 넷이 자주 어울렸습니다. 그러다보니 대중적으로는 취향이 점점 멀어졌죠. 음악적으로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무엇이 있었어요. 미국에 유학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선 최소치의 해결책, 기준점 같은 것이 없었어요. (그는 버클리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이어서 대학원코스를 뉴 잉글랜드음악원(New England Conservatory Of Music)에서 밟았다. 그는 “버클리에 만족하지 않았다”고 했고, 뉴 잉글랜드음악원은 클래식이 70%인 곳이라고 했다)

    미국에선 지금 언급한 음악적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나요?
    결국 팻 매스니(Pat Metheney)였어요. 사실 미국에 가기 전부터 알긴 했고, 김광민도 '너 스타일 것이야!'라고 소개한 바 있거든요. 그의 음악은 형식, 변화추구, 기타연주 모든 면에서 굉장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순수 창작적인 면에서 탁월했던 거죠. 결국 음악은 크리에이티브(Creative) 싸움이거든요. 보스톤의 한 클럽에서 실제로 팻 메스니가 기타 치는 것을 들었어요. 한마디로 '난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좌절이었죠. 그때부터 기타를 버리고 피아노로 돌려 창작으로 전환했습니다. (박교수는 나를 음악으로 인도한 앨범도 팻 메스니의 < Offramp >를 꼽았다. “이건 내가 해결을 봐야겠다!”)



    음악적으로 미국에서 느낀 게 있다면.
    미국에선 '재즈'와 '현대 (클래식) 음악'이 접목되어 있습니다. 우린 떨어져있죠. 거기서 서양음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게 소득이었어요. 보고 듣는 측면에서 A클래스 뮤지션과 교류한 것도 영광이구요. 89년 말 귀국했죠. (웃으며) 하지만 미국에 갔다 왔더니 '옛날 사람'이 되어 있던데요.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음악적 행위를 '상업적 가치가 없는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음악을 위한 환경조성'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시장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박교수는 현재 영화음악, 광고음악, 드라마음악에 집중하고 있다. 영화는 그간 <번지점프를 하다> <오버 더 레이보우>를 맡았으며 드라마로는 <재즈> <아일랜드>를 비롯해 최근작으로 <환생>이 있다.

    추천하는 음악가는 토머스 뉴먼(Thomas Newman), 제임스 뉴튼 하워드(James Newton Howard),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로 모두 영화 스코어 작곡가들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크리에이티브 싸움'의 위대한 승자들이라고 할까.

    그는 동서남북 시절부터 지금까지 “따라 치고 모방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비록 동서남북 음악을 좋아하던 음악 흉내 내기라고 했지만 그것은 흉내가 아니라 창작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바로 이 '창작'이란 말이 인터뷰를 시종 관통했다. 거기에는 상업적 틀과 패턴에 철저히 포박되어 질적 콘텐츠가 태부족인 우리 음악풍조에 대한 은근한 질타가 얹혀 있었다.

      2005/07 임진모 (jjinmoo@izm.co.kr)
    -출처 : IZM

    앨범리뷰,

    하나가 되어요 나 비 모래위에 핀 꽃처럼 밤 비 나 비(Extended Version) 빗줄기 그 대 바 람

    기 획:양병집 Produced By이승용 Engineered By 최세영 Designed By 윤진호 Recorded At 서울 스튜디오·영동 스튜디오(1980년)

    영원한 ‘靑 年 音 樂’ - 東쪾西쪾南쪾北 80年代 중반 우리 大韓民國

    비록 정치적으로는 그 이전 시대 보다 진보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기는 했지만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는 격동의 70년대를 지나 그 나름대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던 그런 시절이었던 것 같다. 취미인지 직업인지 다소 애매모호하기는 했지만 당시 필자는 대중음악 해설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 대중음악도 역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이야 당시의 한국 대중음악 변화가 그 근본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제한적 시도였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헤비메틀을 포함한 본격 록 등 다양한 장르 음악의 시도, 히트곡 한 두 곡으로 앨범을 만들던 시대에서 본격 앨범용 음악으로의 변화, 컬러 TV 시대에 부합되는 A/V용 가수들의 각광 등 다소 과장한다면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라 해도 좋을 정도로 괄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급속한 변화를 마음속으로 환호하면서 필자는 역설적으로 70년대 우리의 젊은 청년문화를 대표하던 포크 음악의 쇠퇴를 가슴 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차에 쇠퇴하던 한국 포크 음악의 명맥을 잇기 위해서는 초기 포크송 아티스트들의 재등장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 잠시 음악 일선에서 몰러나 있던 한국 포크 음악의 기인이자 거물이던 양병집씨의 앨범 제작을 자청하고 나섰다.

    양병집씨는 자신의 새앨범 제작에는 선뜻 응했으나 음악 방향에 대해서는 정통 모던 포크 취향을 원했던 필자와는 심한 이견을 보여 포크록 더 나아가 프로그레시브나 헤비메틀 까지 자신의 음악세계를 확장하려 했다. 이러한 의견차로 앨범 제작이 난항을 거듭하자 그는 새로운 곡을 쓰기 위해 복잡한 서울을 떠나 낙향해야겠다고 이야기하며 필자에게 케이스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카세트 테이프와 마스터 테이프라고 하기에는 너무 볼품 없는(?) Work Tape 형태의 릴 테이프를 하나 넘겨 주었다. 1980년 말 의욕적으로 앨범을 만들기는 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제대로 홍보 한 번 못해보고 사라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설명과 함께 양병집씨는 앨범에 대한 권리를 나에게 양도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양병집씨가 앨범 제작에 소홀할까 두려워 자세한 결정은 후에 하기로 하고 일단 동서남북 이라는 그룹의 마스터 테이프를 필자가 보관하기로 했다.

    그후 별반 기대를 갖지 않고 테이프를 들어보니(사실 그 테이프는 완벽한 것은 아니었고 녹음 상태도 좋지 않았다.) 타이틀곡 ‘하나가 되어요’는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록 비트의 다소 리듬있는 발라드로서 쉽게 친숙할 수 있는 곡이었다.

    하이 옥타브를 처리하는 보컬 창법이 다소 문제있는 듯 하기는 했지만 판에 박은 듯한 꾸며진 창법에 익숙했던 당시로는 새로움을 주는 맛도 있어 보컬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그 참신함이었다. 흔히 당시의 밴드 지망생들이 범하기 쉬운 외국 그룹의 모방이 아니면서도 한국적 진부함에서는 벗어난 ‘새로운 느낌’ 그리고 더하여 신인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세련됨이 인상적이었다. '하나가 되어요’로 이들의 음악에 주목하려 할 때 다음곡으로 들어본 ‘나비’는 조금 과장하면 하나의 충격이었다.

    당시 한국의 팝스계는 성시완씨 등의 활발한 소개로 프로그레시브 음악이 인기를 모아가고 있었지만 정작 창작곡은 문자그대로 불모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비’는 우리 프로그레시브 음악을 갈구했던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꽤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특히 과도한 건반악기의 사용으로 록 음악의 본류를 벗어나 그 정신을 왜곡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주기까지 했던 해외의 프로그레시브 그룹들과 달리 건반, 기타, 타악기가 조화를 이루면서도 독특한 이미지를 만드는데 성공한 곡으로 그 후 이 앨범이 음악 애호가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사랑받게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곡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외에도 '모래위에 핀 꽃’에서 보여주는 헤비메틀의 느낌이나 연주곡 '밤비’의 서정성도 산뜻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런 음악이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는 우리 대중음악계의 풍토에 대해 적지 않은 실망감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필자가 그 후 발매됐던 앨범을 구해 들어보았던 ‘빗줄기’나 '바람’ 같은 곡도 그 노랫말이 다소 진부하기는 했지만 록 음악의 다양성을 한국 대중음악에도 뿌리를 내리려는 그 실험적이면서도 서정성이 깃든 사운드가 기억에 남는 곡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이 이 음반이 이미 1980년도에 나왔다는 사실이었고 당시 멤버들의 연령이 스물을 겨우 넘은 나이였다는 것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부터 몇년의 세월이 흘러 서울 올림픽을 얼마 앞두고 양병집씨는 호주로 이민을 결정하였다. 필자에게 동서남북의 마스터를 넘겨주고 창작곡을 몇곡 만들기는 했으나 복잡한 외부 문제가 겹쳐 본격 포크 앨범 발매는 불발이 되었고 몇 년전 양병집씨가 말했던 대로 동서남북의 모든 권리는 필자에게 귀속되게 되었다. 필자 역시 광고대행사의 TV-CF PD로 입사하면서 음악 관련 일은 다소간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필자가 입사한 국내 대형 광고대행사였던 C기획에는 동서남북의 주요 멤버이자 이광조의 밀리언 셀링 히트곡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의 작곡자 이태열씨가 오디오 PD로 활동하고 있어 업무적으로 자주 만나게 되었고 동서남북 음악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때가 많았다. 그리고 필자와 가깝게 지내던 음악관계자들 중에는 동서남북 음악의 재조명을 위해서 재발매해야 된다는 의견을 주는 분들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필자가 자주 들르던 비디오 샵에서 대학생 몇 명이 테이프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옥신각신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연유를 알아보니 그 주인이 어렵게 구한 카세트 테이프 하나를 서로 자기가 먼저 가지고 가겠다고 싸우는 것이었다.

    그룹사운드 지망생들이었던 그들이 원했던 테이프는 한국 음악들 중 귀한 음악들만 모은 것이라고 하는데 필자가 그 수록곡을 보니 바로 동서남북의 ‘하나가 되어요’와 ‘나비’가 첫 번째로 실려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동서남북의 음악에 대해 물어보니 언더그라운드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그룹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필자는 1988년 재발매 작업에 서둘러 그해 연말에 '아주 오랜 기억과의 조우’라는 부제를 달아 이 음악을 재발매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본격적으로 이 앨범을 홍보해줄 사람이 당시에는 없었다.

    필자 역시 직장 생활 중이었고 자금력이 취약해 홍보 예산을 집행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있는 방속국 PD와 음악관계자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재판을 넘어 3판까지 찍을 정도로 어느 정도의 판매에 성공하였고 일부 지방의 다운타운가에서는 리듬 앤 블루스 스타일로 호소력있는 보컬과 사운드의 '그대’가 새롭게 발굴되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필자에게 알려오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가 되어요’는 다운타운가 히트챠트 Top 10에 오르는 조그마한 기적(?)을 연출하기도 하였고 방송관계자들 중에는 이들의 출연을 제의하기도 했으나 박호준, 김광민씨 등이 미국으로 유학중이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이들의 재결합이 있었다면 보다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당시에는 많이 가졌던 것 같다.

    이러한 아쉬움도 세월과 함께 잊혀져 다시 10년이라는 세월이 더 흐르자 취미활동으로 음반을 수집하거나 또는 광고용 BGM 음악을 고르는 일 외에는 점차 대중음악계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었고, 한국에 팝 음악을 제대로 소개하고 한국 대중음악의 발전을 위해 조그마한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선배들과 술자리에서 열변을 토하던 나의 젊은 시절은 아주 오랜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런 중에서도 몇몇 음악관계자들은 간헐적으로 동서남북 음반의 재발매를 제의하기도 했으나 마스터를 보관해 오던 '예음사’의 담당자들에게 그동안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않은 미안함과 그 누군가 나에게 이야기해 준 것처럼 '신화는 신화로 있을 때 신비로운 것이다"라는 말이 꽤 의미있다고 생각된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었다. 사실은 모두 필자의 게으름 때문이었겠지만… 그러던 어느날 음반 수집에 조예가 깊어 평소 가깝게 지내던 S그룹의 S부장님이 일본에 있는 음반 수집가가 한국 대중음악 앨범중 꼭 구하고 싶다는 목록을 전해주면서 협조를 부탁했다. 그 목록을 보니 외국인이 어떻게 그렇게 한국의 포크 음악과 록 음악에 대해 조예가 깊은지 놀라움을 지나 약간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음악적으로 뛰어난 작품들로만 작성된 그 목록에 N.E.W.S라는 앨범이 있었다. 나 자신도 어떤 그룹인가 하고 잠시 생각해 보니 바로 동서남북의 앨범이 아닌가!

    이런 에피소드가 또 한 번의 계기가 되었고 성시완씨의 적극적인 권유로 시완레코드사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잊혀진 명반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출반되는 영광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동서남북의 음악은 참 특이한 음악이다.
    필자 역시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명반이라 불릴 정도로 그 음악성이 높다고는 솔직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끈질긴 생명력으로 비록 많은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소중한 사랑을 받는 음악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그 가치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을 이 음악이 갖고 있는 청년정신 - 어느 기업의 광고에서도 인용했듯이 영원한 도전정신 -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음악으로는 비록 성숙하지 않을 지는 몰라도 이 앨범에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패기가 있고 ’하나가 되어요’나 ‘나비’에 열광했던 젊은이들의 추억이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세월이 흐르고 유행음악의 그 유행이 바뀌어도 이 음반의 진가를 인정하는 청년들의 순수함은 언제나 이들의 음악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이 아닐까?

    동서남북 멤버중 박호준씨는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재즈 음악을 전공해 현재 우리나라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대중음악과 상업용 음악에서도 나름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김광민씨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그 성가를 높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태열씨 역시 중견 레코드사 간부로 한국 대중음악에 새 바람을 불어 넣고 있으나 그 외 멤버들은 음악계의 일선에서는 떨어져 있어 그 소식을 자세히 듣지는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쓰다보니 벌써 어둠을 지나 새벽이 다가오고 있다. 음악 설명에 대한 글이 아니라 어줍잖은 필자의 잡담이 되고만 것은 동서남북의 음악을 처음 듣고 흥분을 느끼던 시절의 청년정신이 그리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벌써 추억을 먹고사는 연배가 된 것은 아닌지, 어둠속에서 소리 없이 다가오는 새벽 여명을 느끼며 이 앨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니 동서남북의 음악이 바로 긴 어둠을 지나 새롭게 싹트기 시작한 한국 록 음악의 여명을 밝혔던 음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 빛이 찬란하지는 않지만 그 빛줄기 하나만으로도 모든 암흑을 잠재우고 자신만의 빛을 뽐낼 수 있는 그런 음악 - 아무도 찾지 않는 길을 외롭게 그 선두에 서서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깃발을 들고 있는 기수가 되기를 자처했던 그런 음악!

    동서남북처럼 멀리 퍼져나가 누구에게나 사랑 받기를 원했고 비록 그런 커다란 사랑을 받지는 못했어도 그런 사랑을 받았던 음악들이 모두 잊혀질 때에도 사람들의 잠재된 기억속에서라도 살아 숨쉬고 있는 그런 음악을 이 음악의 사운드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 음악을 만들거나 기획하고 제작했던 많은 사람들까지도 ‘망각의 강’을 건너고 있는 시각에 다시 한 번 생명력을 넣어준 성시완씨 이하 시완레코드사 직원 여러분들에게 제작자의 한 사람으로서 송구스런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음악의 주인은 제작자나 뮤지션이 아니라 그 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팬들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망각했던 죄인으로 오랫동안 갖혀있던 ‘마음의 감옥’에서 필자를 자유롭게 해준 그런 고마움 때문일 것이다.

    글/ 이승용

    -출처 : 고려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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